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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들을건대 1학년 2학기/산업과기술

산업과기술 4주차

by 공부해열 2021. 9. 23.

이번강의는 저번강의에 이어 심화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기술산업화, 면공업과 공장제, 방적기, 증기기관 활용, 교통수단의 발달 등 다양한 사업혁명기술에 대해 배웠습니다.

 

기술과 산업화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영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기술적·조직적·경제적·사회적 변화를 지칭하는 용어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도구에서 기계로의 전환이 본격화됐고 조직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가내공업에를 대신해 공장제가 정착됐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내 시장과 해외 식민지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자본 축적이 이루어졌고 사회적 측면에서는 산업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계급사회가 형성됐다. 산업혁명을 통해 인류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물적 토대를 구축하게 됐으며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급속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면공업과 공장제

산업혁명의 주역은 면공업이었다. 면공업의 주요 공정은 목화에서 추출한 애벌 실로 방사를 만드는 방적 부문과 방사를 짜서 직물을 만드는 방직 부문으로 구분된다. 면공업의 기술혁신은 1733년에 케이가 자동 북이라는 방직기를 발명함으로써 시작됐다. 그것은 북이 홈통을 따라 자동으로 미끄러지는 기계였다. 케이의 발명 덕분에 방직 부문의 생산성이 향상하자 방적 부문이 이를 받쳐 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760년에 기술공업장려협회는 방적기를 발명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에 부응해 하그리브스는 1765년에 제니(jenny) 방적기를 발명했고, 아크라이트는 1769년에 수력 방적기를 개발했다. 특히 아크라이트는 사업에 대한 감각을 타고난 인물로서 자신의 수력 방적기를 바탕으로 공장을 건설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아크라이트에게는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가로챘다`라는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됐다. 이 때문에 그는 두 번의 특허 소송에 휘말렸고 결국 1785년의 재판에서 특허 무효의 판결을 받았다. 그의 공헌은 기술의 변혁기에 여기저기 널려진 발명을 사용해 하나의 기계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도구에서 기계로. 13세기에 사용됐던 베틀과 19세기의 기계화된 면화 방적 공장.
산업혁명기의 방적기는 크럼프턴이 1779년에 뮬 방적기를 발명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18세기에는 100만 파운드의 면화를 실로 가공하는 데 5만 시간의 노동력이 요구됐지만 뮬 방적기가 활용된 이후에는 2,000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노새가 잡종이듯이 뮬 방적기는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의 장점만을 조합한 혼성 기계였다. 제니 방적기가 생산한 실은 가늘기는 했지만 쉽게 끊어졌고 수력 방적기가 생산한 실은 튼튼하기는 했지만 거칠었다. 뮬 방적기가 발명됨으로써 비로소 튼튼하면서도 가는 실이 생산될 수 있었다.

다양한 방적기가 잇달아 개발되면서 면공업의 상황은 역전됐다. 1760년 무렵에는 우수한 방적기가 없어서 문제였지만 1790년 무렵에는 방사가 과잉으로 생산돼 이를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그것은 카트라이트가 1785년에 역직기를 발명함으로써 돌파되기 시작했다. 역직기는 씨줄에 낙하하는 바다(reed)와 날줄을 왕복하는 자동 북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최초의 역직기는 조잡한 것이었지만 이후에 많은 사람에 의해 지속해서 개량됐다.



아크라이트의 방적기.

산업혁명기의 면공업은 다양한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연평균 5%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면공업은 공장제가 먼저 발달한 영역이기도 했다. 공장제는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가 활용되면서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아크라이트는 1771년에 최초의 방적 공장인 크롬 포드 공장을 설립했으며 이후에는 공장의 수와 규모가 계속 확대됐다. 1815년은 맨체스터에 있는 방적 공장의 평균 노동자 수가 300명에 달했으며 1,6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공장도 있었다. 1830년대에는 카트라이트의 역직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공장제가 전면적으로 성립됐다.

공장제의 성립은 새로운 생산 관계의 정립을 의미했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는 온정적 관계에서 금전적 관계로 전환됐다. 각종 기계가 도입되면서 경제적 지위가 낮아지고 기존의 사회적 관계가 붕괴하자 노동자들은 매우 과격해졌다. 기술자나 기업가를 협박하고 기계를 부수고 공장을 불태우는 일이 빈번해졌다. 케이, 하그리브스, 아크라이트, 카트라이트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러한 `기계 파괴 운동`은 181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전설적 인물인 러드의 이름을 따 `러다이트 운동으로 불리게 됐다.
공장제가 정착되면서 노동 규율을 정립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기존의 노동자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고 다른 요일에는 푹 쉬어는 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다. 노동 규율을 주입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사용했던 기술적 수단은 시계였다. 공장에 시계가 도입되면서 작업은 생체 리듬이 아니라 시계의 시간에 맞추어 진행됐다. 처음에는 시계를 독점한 공장주가 시간을 속여서 많은 작업을 하도록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정확한 시간의 중요성을 체득한 다음에는 초과 노동 시간에 대해 수당을 요구하게 됐다. 이제 시간이 `때우는` 것에서 `사고파는` 것으로 변했다. 시간의 관념이 중요해지면서 공장에는 작업 시간과 작업량을 점검하는 표가 도입됐고 그것은 다시 시간의 관념을 더욱 강화했다.

증기기관의 활용

증기기관은 처음에 탄광용 펌프로 사용됐다. 17세기부터 연료가 목탄에서 석탄으로 대체되면서 탄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탄광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통풍과 배수의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증기기관이 출현했다. 1698년에 새버리는 증기 양수 장치를 발명했고 그것은 뉴커먼이 1712년에 대기압 증기기관을 개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시에 글래스고 대학의 도구 제작자였던 와트는 뉴커먼 기관의 모형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1765년에 분리 응축기를 발명했다. 뉴커먼 기관의 경우에는 한 번 사용한 후에 실린더 안에 냉수를 넣어 수증기를 냉각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린더를 다시 가열하려면 그만큼 많은 석탄이 소비됐다. 이에 반해 와트는 실린더로부터 분리된 응축기를 별도로 만들어 실린더 안의 수증기를 관을 통해 뽑아낸 후 실린더 바깥에서 냉각시키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증기기관의 열효율을 대폭으로 향상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에 관한 연구는 한동안 중단됐다가 볼튼의 지원으로 1774년부터 다시 시작됐다. 1775년에는 상업용 증기기관이 완성돼 보름 필드의 탄광에서 시 운전되는 것을 계기로 전국의 탄광에 확산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와트와 볼턴은 탄광용 펌프뿐만 아니라 당시에 많은 수요를 가지고 있었던 제분기나 방적기에 사용될 수 있는 증기기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엔진이 필요했는데 와트는 1781년에 회전 엔진에 필수적인 유성식(遊星式) 기어를 발명했다. 또한 와트는 1782년에 피스톤을 동시에 밀고 당길 수 있는 복동식 증기기관을 개발했으며, 1784년에는 피스톤이 원활하게 운동할 수 있게 하는 수평운동 장치를 고안했다. 와트의 복동식 증기기관이 상업화됨으로써 증기는 용도에 제한받지 않는 만능 동력원으로 사용됐다. 증기기관은 1789년에 카트라이트의 역직기에 적용되는 것을 계기로 탄광에 이어 방적 공장, 제분소, 제련소 등에서도 널리 활용됐다. 19세기에 들어와 증기기관은 증기기관차를 통해 철도의 시대를 개막하기도 했다.


와트 복동식 증기기관.

와트의 증기기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신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첫째는 와트의 증기기관이 블랙의 잠열 이론과 같은 과학지식을 응용함으로써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와트의 발명 과정을 엄밀히 검토한 연구 결과는,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이후에 자신의 발명을 합리화하기 위해 잠열 이론을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와트는 뉴커먼 기관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후에 블랙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를 통해 소량의 증기만이 물을 끓이는 데 사용되는 것은 증기의 잠열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증기기관이 블랙의 잠열 이론을 바탕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와트가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에 자신의 발명을 과학적 지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와트가 복동식 증기기관을 발명하는 데에는 뉴커먼 기관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일반화된 모델을 만들어 실험하는 방법이 큰 역할을 했으며, 이는 과학자들의 연구 방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두 번째 신화는 와트가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그럴듯하다. 주전자 물이 끓는 것은 매우 흔한 현상이기 때문에 이것이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오히려 와트가 증기기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주전자의 물이 끓는 현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뉴커먼도 주전자에서 물이 끓은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기술은 기존 기술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출현하며, 하나의 기술이 세상에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후속 작업이 지속해서 수행돼야 한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곧바로 위대한 발명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철골업과 기계공업

산업혁명기에는 면공업과 같은 소비재공업뿐만 아니라 철골업이나 기계공업과 같은 생산재공업도 발전했다. 철골업은 철광석을 용광로에서 녹여 선철을 만드는 제선 공정, 선철을 가공해 더욱 우수한 품질의 강철을 만드는 제강 공정, 선철 혹은 강철로 최종 제품을 만드는 압연 공정으로 나뉜다. 1709년에 답에(Abraham Darby, 1678~1717)는 목탄 대신에 코크스를 원료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 양질의 선철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 기초를 닦았다. 코크스를 사용하는 방법은 답이 2세에 의해 더욱 개선돼 1735년부터 성공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답이 가문은 철 공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는데 답이 3세는 1775~1779년에 콜브루크데일의 세번강에 60m나 되는 대형 교량인 아이언 브리지를 건설하는 작업을 주관하기도 했다.

1742년에는 헌츠먼이 도가니 제강법을 창안함으로써 이전에 비해 경제적으로 선철을 가공할 수 있게 됐다. 또한 1783년에는 코트가 교반법과 압연법을 개발해 양질의 철강재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교반법은 철을 죽과 같은 상태로 만든 후에 쇠막대기로 휘저어 탄소와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법이며, 압연법은 액체 상태의 철을 롤러 사이로 통과시켜 가공하는 방법이다. 철골업은 기계의 보급과 철도의 건설을 배경으로 급속한 성장을 경험했으며 영국은 1812년부터 철 수입국에서 철 수출국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에는 강철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고 압연 공정도 완전히 자동화되지 않았다.

산업혁명의 초기에는 기계가 해당 공장에서 직접 제작됐지만, 점차 기계를 제작하는 산업이 독립적인 영역으로 발전했다. 그것은 기계를 만드는 기계를 생산하는 것으로서 공작기계 산업으로 불린다. 본격적인 공작기계는 윌킨슨이 1774년에 우수한 천공기를 개발함으로써 출현하기 시작했다. 윌킨슨은 탄광, 주석 광, 제련소, 창고를 잇는 `산업 왕국`을 보유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사실상 윌킨슨의 천공기가 있기 전에는 기계의 정밀도가 매우 떨어졌다. 1760년대에 제작된 증기기관에는 실린더와 피스톤 사이에 1/2인치나 되는 틈이 있을 정도였다. 와트가 자신의 증기기관에 적합한 원통형 실린더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윌킨슨의 천공기 덕분이었다.

공작기계 산업은 기계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예를 들어 브라마와 모즐리는 자물쇠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과정에서 표준화된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공작기계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모즐리는 1797년에 나사 절단용 선반을 개발해 정교한 금속 부품을 생산할 수 있게 했고, 1841년에는 피트 워드가 표준 나선 측정법을 창안해 공작기계의 정밀도를 더욱 향상했다. 1839년에 증기해머를 발명했던 나스미드는 1883년에 발간한 『자서전』을 통해 공작기계에 대한 지식을 확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공작기계 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한 기술자들은 강한 유대 관계를 하고 있었다. 모즐리는 브라마의 제자였고 휘트워스와 나스미디어는 모즐리의 제자였다.

교통수단의 발전

산업혁명기에 교통수단의 발전은 세 가지 국면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1 국면은 도로의 개량이었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새로운 도로 포장법이 개발되면서 도로의 개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에 새롭게 건설된 도로는 유료도로의 형태를 띠었다. 교구가 도로를 관리하는 방식을 대신해 지주, 상인, 제조업자 등으로 구성된 트러스트가 도로를 상업적으로 운영했다. 대부분 유료도로는 30마일 정도로 짧았지만 많은 도로가 연결돼 전국적인 연결망이 형성됐다. 영국의 도로망은 1750년에 3,400마일에 불과했지만 1770년의 1만 5,000마일을 거쳐 1836년에는 2만 2,000마일로 증가했다.

교통수단 발전의 제2 국면은 운하의 건설이었다. 영국은 하천의 폭이 좁고 길이가 길며 수량도 풍부했기 때문에 운하의 건설과 활용에 양호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운하 건설은 176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 열광적으로 추진됐으며 18세기 말 영국에서 운항할 수 있는 수로는 2,000마일에 이르렀다. 운하 건설에는 많은 자본이 소요됐기 때문에 주식회사를 설립해 자본을 조달하는 방식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또한 도수관이나 지하 터널과 같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됨에 따라 많은 기술자가 운하 건설에 참여했다. 운하 건설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기술자는 브린들리였다. 그의 기술적 지도를 바탕으로 워 슬리? 맨체스터 운하, 맨체스터? 리버풀 운하, 대간선 운하 등이 건설됐다.

교통수단 발전의 제3 국면은 철도의 건설이었다. 처음에 철도는 탄광 내부에서 사용되다가 점차 광산 지역과 공업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8세기 후반부터 많은 기술자는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면서 레일과 차바퀴의 마찰로 기차를 움직일 방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와트의 조수였던 머 독은 1784년에 증기기관차의 모형을 만들었고 콘월 지방의 광산 기술자였던 트레비댁은 1804년에 시속 4마일의 증기기관차를 제작했다. 증기기관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티븐슨은 1814년에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속 12마일의 증기기관차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의 장거리 철도에 해당하는 리버풀? 맨체스터 철도는 1830년에 개통됐는데 스티븐슨의 로켓 호가 시속 14마일로 달림으로써 철도에 대한 붐을 일으켰다.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19세기 후반은 `철도 건설의 위대한 시대`로 불린다. 1840년대 이후에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철도를 건설했다. 1840년과 1914년의 철도망을 비교해 보면 프랑스는 410㎞에서 3만 7,400㎞로, 독일은 469㎞에서 6만 1,749㎞로, 영국은 2,390㎞에서 3만 2,623㎞로, 미국은 4,510㎞에서 41만 475㎞로 증가했다. 자연적 조건에 제약받지 않았던 철도는 점차 마차와 운하를 대체함으로써 지배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철도의 발달을 계기로 국내 시장의 단일화가 이루어져 지방경제는 국민경제의 차원으로 승화됐다.

철도 건설은 금속, 연료, 기계 등을 대량으로 요구했기 때문에 다른 산업 부문에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낳았다. 또한 철도의 건설과 운영에는 막대한 자본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으며 철도를 매개로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 대기업이 형성됐다. 이러한 점에서 철도 산업은 `경영 혁명`의 효시로 불리기도 한다. 철도 산업이 확대되면서 기업 간 통합이 활발히 전개됐고 대기업이 지배하는 체제가 정립됨에 따라 독점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정부의 규제 법안도 제정됐다. 철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표준화 작업이 전개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경우에는 1883년 11월 18일에 전국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표준 시각을 정했고, 1886년부터는 철도 궤간의 크기가 모두 4피트 8.5인치로 통일했다.

산업혁명은 기술의 역사에서 어떤 의의가 있을까? 개별적인 기술혁신은 이전부터 계속됐지만, 산업혁명을 계기로 개별적인 기술혁신이 상호 연관을 맺으면서 서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이 `혁명적`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기술혁신의 상호 연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증기기관은 방직기에 활용됐고 면공업의 발전은 더 많은 증기기관을 요구했다. 증기기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양질의 철이 필요했고 용광로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 데에는 증기기관이 활용됐다. 철도가 건설되면서 철광석의 수송비용이 낮아졌고 이에 따라 철의 생산비용도 낮아졌다. 그것은 다시 저렴한 철도를 가능하게 했으며 수송비용을 더욱 낮추는 결과를 유발했다. 철도의 동력원으로 증기기관이 활용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술혁신 사이의 상호 연관성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후발 공업국의 산업화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처음에 영국에 국한돼 사용됐지만, 점차 다른 지역에 확대돼 적용됐다. 19세기에는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이 급속한 산업화의 국면에 진입했고 20세기에는 수많은 개발도상국이 이를 뒤따랐다. 후발 공업국의 산업화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은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를 막기 위해 기술자의 해외여행과 기계의 수출을 금지하는 조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기술도 선진 공업국에서 후발 공업국으로 전파되기 마련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기술의 수출이 차단돼 있더라도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선진국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790년에 미국에서 최초의 방적 공장을 세웠던 슬레이터는 아크라이트의 공장에서 경험을 쌓은 후 농민으로 변장해 미국으로 탈출했다. 1791년에 독일의 기술자인 라이헨바흐는 영국을 여행하는 중에 술값을 조금 주고서 와트의 증기기관을 주제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러한 사정은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였던 영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1716년에 존 롬은 이탈리아로 가서 연사기를 훔쳐보고 설계도를 그린 후 영국으로 탈출해 1720년에 공장을 차렸다. 롬의 여행은 영국 공장 제도의 효시로 평가되기도 한다.

후발 공업국의 산업화는 영국의 영향 아래서 이루어졌지만 해당 국가가 처해 있는 여건과 대응 방식에 따라 독특한 모습을 나타냈다. 프랑스에서는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증기기관의 이용이 제한됐고 오랫동안 수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프랑스의 면공업에서는 19세기 내내 가내 수공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사치재의 성격이 강한 고급직물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산업화를 주도한 것은 면공업과 같은 소비재공업이 아니라 철골업을 비롯한 생산재공업이었다. 또한 독일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투자 은행을 통해 자본이 조달됐고 기업 간 협력 체제가 조기에 구축됐으며 정부가 적극적인 산업 진흥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지만,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삼림 자원이 풍부해 코크스 제철법의 도입은 지연됐던 반면 노동력의 부족으로 농업의 기계화가 다른 국가보다 빠른 속도로 전개됐다. 특히 미국의 산업화에서는 '미국식 생산 체계'라는 독특한 방식이 출현하기도 했다. 미국은 금속을 가공하는 산업에서 교환 가능한 부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수공 업적 생산에서 요구됐던 맞춤 과정을 생략하고 수리를 간편하게 했다. 미국식 생산 체계는 총기 제조업에서 시작된 후 재봉틀, 타자기, 자전거, 자동차 등으로 확대되면서 더욱 정교화됐다.

미국식 생산 체계는 기술사에서 격렬한 논쟁이 촉발됐던 주제 중의 하나다. 부품의 호환성이 강조됐던 이유를 노동력 부족에서만 찾기는 어렵다. 미국식 생산 체계가 구현되기 시작한 공간은 조병창이었고 군부가 민간에 없는 시장을 창출했다는 점이나 미국 사회가 유럽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이기 때문에 대중적 시장이 일찍부터 발달했다는 점도 강조돼야 한다. 동시에 19세기에 부품의 호환성이 실제로 구현됐는가 하는 점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미국식 생산 체계가 다른 부문으로 확대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더 나아가 미국식 생산 체계가 미국 기술의 고유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해석이라는 비판도 있다.

산업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도는 1851년이다. 그해에는 세계 최초의 박람회인 `수정궁 박람회`가 런던에서 개최됐다. 이후에 박람회는 세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개최됐고 박람회를 계기로 기술을 발명하는 것은 물론 기술을 선전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했다. 수정궁 박람회에서는 영국의 기술이 대부분이었지만 후발 공업국의 기술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수정궁 박람회를 개최했지만, 그 박람회를 전후해 후발 공업국들의 추격이 본격화됐고 19세기 후반에는 독일과 미국이 영국을 앞지르는 상황이 전개됐다. 영국으로서는 1851년이 역설적인 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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